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태 타이거즈 (문단 편집) ==== [[한국프로야구/1998년|1998년]] ==== 그러나 1998년 이후로 해태는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모 회사인 [[해태그룹]]이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고[*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 후 정확히 1주일 후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부도]]났다.] 이종범의 일본 진출로 전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 [[선동열]], [[이종범]]의 일본 진출도 본인들이 원해서 간 것도 있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현금]] 확보를 위한 면이 컸다. 특히 이종범의 경우 [[김응용]] 감독이 향후 10년은 팀을 이끌 주축 선수로 주목했다는 점에서 그 공백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종범의 해외 진출에 묻혀서 그렇지 한때 에이스 역할을 하던 [[조계현]]을 현금 4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 당시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던 구단으로 [[2002년 한국시리즈|첫 우승]]을 위해서라면 '''[[과금전사|물 불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으로 승부했다.]]''']로 합의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고액 연봉자인 [[이순철]]을 방출하는 등,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둘은 이미 하와이 스프링캠프 때 구단의 내분을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주도]]했으므로 어느 정도 김감독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조건을 갖춰 줬다. 1998년 전체만 보면 '''말 그대로 "[[이종범|종범]]이만 있었어도" 정도로 괜찮았다'''. '''에이스 [[이강철]]이 15승을 거두며 1992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뒇고 '''차기 에이스였던 12승을 거둔 [[이대진]]도 [[현대 유니콘스|현대]]와의 경기에서 10타자 연속 [[삼진(야구)|삼진]] 잡을 정도로 건재'''했으며 '''어린 유망주 [[김상진(1977)|김상진]]이 생애에서 마지막의 불꽃을 태우듯 3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마무리에는 데뷔 3년차 신인 [[임창용]]이 철벽같이 버티고 있었다.''' 일부는 임창용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보다 이 시기에 더 강력한 구위를 구사했다고 평가한다. '''statiz 기준 1998 시즌 WAR 1위는 임창용'''이었다. 게다가 타선도 나쁘지 않았다. [[김창희(야구)|김창희]]가 조금이나마 성장세를 보이고 [[장성호]], [[이호준]]이 본격적으로 3할 타자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오히려 이종범이 해태에 잔류해서 계속 1996~1997년처럼 호령했다면 짜임새는 더 좋았을 뻔했다. [[외국인 선수]] 도입 첫 해인 만큼 다른 구단처럼 OB의 [[타이론 우즈]]는 바라지 않아도 우즈 다음으로 현대에서 맹활약하던 [[스캇 쿨바]]급의 용병이 있었다면 모를 일이었다. 아니 숀 헤어가 규정 타석 채워서 .280 15홈런만 치는 [[조엘 치멜리스]] 수준이었어도. 전체적으로 투수력도 좋았고 무엇보다 이강철-이대진의 원투펀치와 임창용의 철벽 마무리의 조화가 최고인 시즌이었다. 장성호는 15홈런+타율 5위를 기록하면서 볼넷도 골라내는 대단한 1번 타자였다. 여기까지 장성호는 이종범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주루 스피드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물론 어디까지나 이종범과의 비교고 장성호가 주자로서의 주력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클린업의 축이었던 [[홍현우]]와 [[이호성|성님]]이 조금 부진[* 홍현우는 1998 시즌 잠시 부진했지만 1995년~1997년 3년 내내 [[KBO 골든글러브]] 및 3할을 유지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모 성님께서 1995년/96년 일시적으로 부진하면서 뭔가 조짐이 이상하기 시작했다.]했다.[* 해태가 1993년부터 해태가 멸망할 때까지 8년 연속으로 1번 타자들은 전체 구단 1번 타자의 최고 생산력을 기록했다. 1991~1992의 이순철도 대단했지만 동시기에 빙그레의 [[이정훈(1963)|이정훈]]이 있었다. 말하자면 1990년대의 해태 1번 타자들은 도루를 빼도 왠만한 구단의 3번 타자를 훨씬 능가하는 생산력을 자랑했다!] 그것은 이해 해태가 최저 득점(489)을 올리는 원인이 됐다. 그러나 어째튼 장성호와 이호준의 성장으로 99년에는 해태 타선에 양준혁과 용병 2이 가세한 것, 홍현우의 각성으로 가히 핵폭발을 일으키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마지막 OB와의 2경기를 남기고, 해태는 분수령에 서있었다. 2경기를 모두 이기면 시즌 3위[* 승패는 같지만 10승 8패로 LG에 우위를 보였기에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광주에서 치루게 되는 것이었다.], 1무만 거둬도 플레이오프 진출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OB에게 2연전 싹쓸이 패. 특히 마지막 경기는 임창용이 [[중무리|3회에 등판했음]]에도 11:5로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해태는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야만없이긴 하지만 이종범이 있었다면, 그래서 몇 승이라도 더 챙길 수 있었다면 1998년 포스트시즌의 양상은 크게 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이종범이 아니라 중박이상 치는 타자 용병, [[타이론 우즈]]급은 아니더라도 [[스캇 쿨바|쿨바]], [[조엘 치멜리스|치멜리스]] 하다못해 [[숀 헤어]]가 풀시즌 .260 15홈런 정도만 하는 외국인 선수였다면 이런 탈락은 없었을 것이다.[* 숀헤어는 당해년도 타율 0.206 무홈런 14안타, 3타점이 전부였다. 그 꼴찌를 한 [[롯데 자이언츠]]의 용병인 [[덕 브래디]] 보다도 못한 결과였다.][* 게다가 트라이아웃에서 지명했던 투수 윌리엄 채드 저비와도 계약하지 못하면서 외국인 선수 덕을 전혀 못 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